기사제목 [통일견문록] 우당 이회영 선생의 삶에서 ‘통일 한반도’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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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견문록] 우당 이회영 선생의 삶에서 ‘통일 한반도’를 생각한다

기사입력 2021.07.23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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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당기념관.jpg
서울 중구 남산예장공원 이회영 기념관

 

지난 6월 9일, 서울 중구 남산예장공원에서 우당 이회영 선생의 기념관 이전 개관식이 열렸다. 우당 가문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상징이다. 명동 일대에 대토지를 소유한 대부호지만 전 재산을 팔아 독립운동에 헌신했다. 인간의 자유와 평등, 인권을 존중한 우당과 6형제의 독립운동을 기리기 위해 기념관을 방문했다.
 
세상에 풍운은 많이 일고
해와 달은 사람을 급히 몰아치는데
이 한 번의 젊은 나이를 어찌할 것인가
어느새 벌써 서른 살이 되었으니
- 1897년 30살 이회영이 쓴 ‘소년30세시’ (출처: 이회영 기념관)
 
공자는 서른 살을 ‘마음이 확고하게 도덕 위에 서서 움직이지 않는 나이’ 즉, 이립(而立)이라 했다. 이립의 나이가 된 이회영은 ‘한 번의 젊은 나이’에 무엇을 할 수 있을지를 고뇌했다. 그의 선택은 조국이었다. 밀려오는 외세의 바람 속에서 기울어가는 조선반도를 구하는 데 제 한 몸 바치기로 확고한 마음을 세웠다. 

우당의 청장년기는 그야말로 최고(崔苦)이자 최악의 시간이었다. 1867년 이조판서를 지낸 이유승의 4남으로 태어난 그는 국권 피탈이라는 암흑기에서 청장년기를 보내야 했다. 사실 우당의 가문은 오늘날 표현으로 하면 이른바 ‘황금 수저’다. 시대적 상황과 관계없이 안락한 삶을 충분히 지내고도 남을 정도의 대부호였다. 하지만 그는 일찍이 관직을 포기했다. 개인의 안위보다는 항일운동에 물심양면 하는 삶을 택했다.  

그는 1896년부터 의병운동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황해도에 인삼농장을 경영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이를 주도한 친일파 을사오적의 암살을 준비하기도 했다. 1907년에는 상동교회 지하에서 전덕기, 이동녕, 양기탁 등을 중심으로 한 독립운동 비밀결사 신민회를 발족했다. 신민은 국권 회복을 위해 자기 스스로 실력을 양성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리하여 자강으로 국권을 회복해 자유 독립국을 세우고, 공화정제를 목표로 할 것을 외쳤다.  

하지만 1910년, 조선은 일제에 통치권을 넘기는 경술국치를 마주한다. 좌절한 우당6형제는 전 재산을 처분하고 만주로 향한다. 이때 헐값으로 처분한 재산의 가치는 오늘날 시세로 약 2조 원에 이른다고 한다. 이곳에서 우당은 ‘낮에는 농사를 밤에는 공부한다’는 뜻의 교민자치단체 ‘경학사’와 독립군 양성기지인 '신흥무관학교'를 세워 독립운동의 기틀을 다졌다. 본격적인 무장항쟁을 계획하기 시작한 것이다.

신흥무관학교는 1920년 일제의 탄압으로 문을 닫기까지 3500여 명의 독립투사를 길러냈다. 큰 승리로 이끈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전투의 주축 또한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었다. 신흥무관학교 출신 학생들은 이후 독립운동에 핵심 역할을 했다. 1920년대 항일부장독립단체 의열단을 이끈 김원봉이 대표적인 이곳 출신 학생이다. 신흥무관학교는 의열단, 한국독립군, 한국광복군 등 우리 독립 운동 역사상 빼놓을 수 없는 단체들의 뼈대로 기능했다. 
 
우당은 끝내 조선의 독립을 눈에 담지 못했다. 1932년, 무장투쟁 기지를 마련하기 위해 북으로 향하던 중 상해 밀정으로부터 정보가 누설됐다. 여순 감옥에 이감된 그는 모진 고문을 받다가 향년 65세를 일기로 순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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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우당기념사업회 홈페이지

 

우당 이회영 선생은 생애 단 한 장의 사진만을 남겼다. 사진관에서 촬영한 것으로 추정되는 증명사진 크기의 사진. 꽉 쥐고 있는 그의 주먹에서 조국독립을 향한 결의가 느껴진다. 여섯 형제 중에서도 행동 대장이었다는 우당의 용기가 없었더라면 오늘날 대한민국은 조금 다른 모습이 아니었을까.

 

청년의 나이가 되어 ‘소년삼십세시’를 바라보고 있노라니 마음이 서글퍼진다. 조선은 피, 땀, 눈물로써 36년의 일제강점기를 극복했다. 하지만 광복의 기쁨을 십분 누리지도 못한 채 동족상잔의 비극을 맞이했다. 일제로부터는 독립했을지언정 한반도는 서로 다른 이념과 체제를 가진 두 개의 나라로 분열되고 말았다.


분단에 대한 책임 의식이 필요하다. 우당을 비롯한 독립투사들이 지켜내려던 한반도의 모습이 작금의 현실은 아니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한 번의 젊은 나이를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개인 안위에만 그치지 않았으면 한다. 특히 청년들의 고뇌가 남북통일의 필요성과 통일된 한반도의 모습을 상상하는 데까지 나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그것이 어쩜 후손으로서의 예의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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