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수 전향진입니다.” 꿈을 묻는 질문에 전향진 씨의 대답은 명료했다. 2014년부터 한국에 정착해 줄곧 노래하는 무대에 서 온 그는 탈북 가수, 북한 가수가 아닌 그저 ‘가수 전향진’으로만 불리고 싶다고 했다.
"물론 북한에서 왔다고 하면 한번 더 바라봐주는 분들이 계셔서 감사하지만, 그 배경 때문에 주목을 받고 거기에 만족한다면 저의 음악적 범위나 설 수 있는 무대는 계속 좁아질 것입니다. 사람들의 편견에서 벗어나 다양한 장르를 부르며 영역을 넓혀가는 것이 제 꿈입니다."
전 씨는 북한에서 ‘1호 가수’로도 불렸다. 선전대 가수로 활동하던 시절, 해당 기업소로 현지지도를 나온 김정일 앞에서 독창을 하게 된 것이 계기가 됐다. 북한에서는 김정일이 관람하는 공연을 ‘모심공연’ 또는 ‘1호공연’이라 칭한다. 그의 모친의 배경도 화려한데, 평양에서 피바다가극단·만수대예술단 가수로 활동했고 고영희(김정일 부인, 김정은 생모), 성혜림(김정일 전처) 등과도 함께 예술단 생활을 했다.
“음악적 재능은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은 것 같아요. 어머니는 일본 태생으로 재일동포 북송사업 때 북한으로 건너 간 분입니다. 어릴때부터 종종 일본이나 남조선(한국) 이야기를 들려주시며, 제가 그런 곳에서 태어났더라면 가수로서 더 잘 됐을거라고 안타까워하셨죠. 결과적으로 저는 지금 한국에 와서 가수가 되었네요.”
전 씨의 외가 쪽 뿌리는 제주도에 닿아있다. 고향이 제주도인 외조부가 전쟁을 피해 일본으로 건너가게 된 것인데, 그의 기구한 가족사에 한반도의 전쟁과 이주 역사, 분단의 아픔이 모두 담겨 있었다.
인터뷰·글 허경은
제주 귀향을 꿈꾸던 외조부
“외할아버지 고향이 제주도 서귀포라고 들었습니다. 어릴적부터 저를 무릎에 앉히시고는 고향 이야기를 많이 해주셔서 집 주소도 기억합니다. 아마도 통일이 되면 그 곳에 가보라는 뜻이었나 봅니다."
6.25전쟁과 제주4.3사태의 혼란을 피해 일본행 연락선에 몸을 실었던 그의 외조부는 같은 고향 출신의 아내를 만나 일본에서 가정을 이루었고 ‘재일조선인 북송사업’(1959년부터 25년 간 조총련계 한국인을 북한으로 송환시킨 프로젝트)에 의해 온 가족이 만경봉호에 오르면서 북한 땅을 밟게됐다.
"북한에서 곧 통일이 된다고 선전하며 그때까지 폐허가 된 땅을 재건할 인력을 모은다고 했습니다. 할아버지도 그 말을 믿으며 3년 정도면 통일이 될 것이고, 그 때엔 고향인 제주도로 다시 내려갈 수 있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북한에 도착하자마자 감시가 붙고 상황이 달라진거죠. 그나마 어머니가 노래를 잘해 평양으로 뽑혀가며 최악의 상황은 면할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의 외조부는 황해도에서 생을 마감했다. 끝내 귀향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통일의 결실도 보지 못했지만 고향집 주소 하나를 외손주인 전 씨에게 남긴 것이 자손들의 한국행을 이끌지 않았을까.
“남들에겐 부러운 삶이었지만”
북한에서 재일동포에 대한 시선은 좋지 않았으나 이들에 대한 대우가 달라진 결정적 계기는 김정일이 재일동포인 고영희를 아내로 들이면서부터라는게 많은 탈북자들의 증언이다. 전 씨도 이와 같이 전하며 "언젠가부터 당에서 재일동포도 같은 민족이니 대우해달라"고 선전하기 시작했다고 했다.
"어머니가 노래를 잘했고 예술단 활동도 활발히 하다보니 해외공연의 기회도 많았습니다. 십여차례 이상을 비행기를 타고 중국을 오가며 공연할 정도로 대우 받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삶을 사셨지만 갑자기 뇌혈전에 뇌출혈까지 겹치며 가세가 기울기 시작했습니다. 당시 군대에 가 있던 동생도 결핵으로 제대해 나오게 돼, 집안에 환자가 두 명이 되다 보니 감당이 안되더군요. 집 안의 온갖 물건을 갖다 팔아 약을 구하고 가족들을 돌보느라 저의 예술활동도 순탄치 않았습니다.”
이를 계기로 그는 탈북을 결심했다.어릴 때부터 한국에 대해 들어온 바가 있어, 여기에서 돈을 벌어 약값 등으로 보내야겠다는 생각에서다.
“2007년에 첫 탈북을 시도했습니다. 제가 도예술단에 있다가 외화벌이사업소 무역과로 뽑혀갔었는데 그 신분 덕에 대표팀의 일원으로 중국에 나간 적이 있거든요. 그때 인연이 닿았던 사람들과 국경경비대원 일부를 통해 도움을 받아 두만강을 건넜습니다. 중국의 지인이 도문 자택에 저를 숨겨 주었는데 그 집에서 창밖을 내려다보면 도문집결소(중국 공안에 체포된 탈북민들이 북송 직전에 임시로 머무는 구류시설)가 눈에 들어와 불안에 떨며 지냈던 기억이 나네요."
대사관 연락을 기다리며 그 곳에서 3개월간 은신해있던 전 씨는 한국행 날짜가 임박해오자 마지막이 될 지 모를 가족들에게 안부인사를 하려고 두만강을 한번 더 건너다 화를 입었다. 강물에 휩쓸려 떠내려가다 다른 국경경비대에 발각돼 체포된 것.
‘1호가수’에서 ‘도강쟁이’로
“한국 갈 날이 확정되니 가슴이 먹먹해지더군요. 여기서는 북한땅을 볼 수라도 있지 한국에 가게되면 정말 영영 못보게 될 것 같아서… 그래서 떠나기 전 이틀만 시간을 달라고 애원하고 강을 건넜는데 강물이 불어난것을 몰랐던거죠.”
전 씨는 불빛 하나 없는 국경경비대 보위부 취조실에서 조사를 받고 보안서, 도집결소 등으로 넘겨진 후 집으로 보내졌다. 탈북이 목적이 아닌 어머니 약을 구하고자 중국 친척들을 만나러 간 것이라고 둘러댄 게 참작됐고 1호 가수로 얼굴이 알려진 덕에 자신을 알아보는 지인(당원)들의 도움이 있어 수용소가 아닌 집으로 귀가조치됐다는 설명이다. 하지만 한번 '도강쟁이'(북중 접경의 강을 넘나든 사람들)란 딱지가 붙어 감시는 더욱 심해졌다.
"그 때 결혼을 하게 되었습니다. 제가 다시 탈북을 시도할까봐 걱정되신 부모님이 가정이라도 이루면 포기하고 정착할까 싶어 중매를 세워 시집을 보낸거였어요. 그래서 결혼해 아들을 하나 낳고 살았는데 남편이 3년만에 간암으로 세상을 뜨면서 결국 어린 아들과 함께 한국으로 오게 됐습니다.”
2014년부터 시작해 올해로 7년째 한국살이를 하고 있는 전 씨는 정착금부터 시작해 수입이 생기는대로 모아 간간이 북한 가족들에게 보내왔지만 안타깝게도 지난 해 8월 아버지의 부고 소식을 받게 됐다.
“뇌출혈로 쓰러진 후 반신마비로 누워계신 어머니를 아버지가 돌봐주셨어요. 그런데 상황이 이렇게 되니 왠지 어머니도 곧 아버지를 따라가지 않을까 불안합니다. 지금은 동생이 엄마를 모시고 있는데 어머니까지 돌아가신다면 남은 동생이라도 이 곳에 데려오고 싶네요.”
다시 무대에 서다
전 씨는 한국 정착 초기에 심한 공황장애와 우울증을 앓았다. 강물에 휩쓸리거나 국경경비대에 붙잡혀 좁은 방에서 취조를 당했던 것들이 트라우마가 되어 국정원 조사 중에도 몇차례 쓰러져 구급차에 실리기도 했다. 서울국립병원에서 정기적으로 진료를 받고 약을 복용하며 1년 반 정도를 지내다가 다시 힘을 낸 것은 노래가 있었기 때문이다.
“할 줄 아는게 노래 뿐이라 탈북민들이 다니는 공연에 합류해 무대에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에서도 새로운 가정을 꾸려 신랑의 지원을 받게 돼 점차 안정을 찾게 됐고 최근에는 방송 출연도 잦아지며 오래 앓아오던 불면증이나 불안증세가 많이 회복되었습니다.”
지난 달부터 방영이 시작된 TV조선 ‘미스트롯2’ 공식 홈페이지에는 전 씨의 프로필이 올라와 있다. 한국의 쟁쟁한 가수들과 경쟁해야 하는 힘든 과정들이 진행 중이지만 그는 “그런 무대에 함께 선다는 것 만으로도 매우 행복하다”고 말했다.
“국정원에서 제게 앞으로 어떤 일을 하고 싶냐고 물었을 때 가수가 되고 싶다고 하니 힘들거라며 다른 직업도 찾아보라고 말해주던 게 생각납니다. 한국에 노래잘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고 북한식 발성과도 차이가 있다보니 나름 조언을 해주신 것이었겠지만 사실 상처가 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유명한 TV 프로그램에 예선과정을 통과해 올라가게 되었으니 얼마나 큰 기쁨입니까. 물론 여전히 탈북가수라는 타이틀이 붙지만, 이렇게 나아가다보면 언젠가는 ‘가수 전향진’으로 당당히 무대에 설 날이 오지 않을까 희망합니다.”
이미 KBS 전국노래자랑(용인시 처인구편 - 2019년 10월 방영분)에서 최우수상 수상의 영예를 안으며 실력을 인정받고 자신감을 얻은 그는 2021년 새해의 시작과 함께 싱글 앨범도 발매했다. 수많은 트로트 히트곡을 제작해 온 김동찬 작사·작곡가가 만든 <관심 좀 가져줘요>가 타이틀이다. 관심을 받고 싶은 여자의 마음을 담은 노래이지만 편견에서 벗어나 똑같은 사랑과 관심을 받고 싶은 모든 탈북민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듯하다.
“이 노래와 함께 <설악산>이란 성악버전 앨범도 동시에 발표했습니다. 한국분들이 금강산에 대한 로망을 갖고 '그리운 금강산'을 부르듯, 훗날 통일된 땅에서는 북한 주민들 앞에서 설악산을 부르며 한국의 명산도 소개하고 싶네요. 하루 빨리 그 날이 오기를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