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정확히 70년 전인 1950년 8월 뜨겁던 여름, 대구 북방 22Km 지점에서는 낙동강 전선을 방어하기 위해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었다. 최근 백선엽 장군의 별세로 재조명되고 있는 다부동 전투가 그것이다. 8월 초부터 말까지 단 한달만에 1만명 이상의 사상자(전사: 국군 2,300 / 미군 1,282)를 낸 다부동 전투는 6.25전쟁 당시 가장 치열했던 전투로 꼽히고 있으며, 이로써 대구 이남 지역을 사수하였기에 인천상륙작전으로 이어질 수 있었다고 평가받는다.
다부동 전투에서는 군인들을 제외하고도 수많은 학도병과 전선에 탄약과 식량을 보급하던 사람들의 희생이 뒤따랐다. 다부고지를 오르내리며 탄통을 들고 날랐던 도용복 사라토가 회장은 이 날의 기억을 생생히 떠올리며 "살기 위해 목숨을 바쳤을 뿐"이라고 말했다. 당시 그의 나이 고작 일곱 살이었다.
6.25전쟁으로 아버지를 생사불명으로 잃은 도 회장은 어머니와 동생들을 부양하기 위해 낮에는 석탄을 메고 밤에는 디스크자키로도 일했다. 만 18세가 되던 해에는 월남전 파병을 지원해 3년 간을 베트남에 있었으며 당시 입은 고엽제 피해로 후유증을 앓기도 했다. 6.25전쟁 70주년을 맞은 지금, 인터뷰 자리에서 만난 도 회장은 한반도 정세에 대해 어두운 안색을 드러내며 “대한민국은 수많은 희생자들의 피로 건국됐다. 지금 세대들이 이런 걸 잘 모르고 자라는 것 같아 안타깝다.”고 전했다.
인터뷰·글 허경은
두 번의 전쟁을 겪다
도 회장의 고향은 경북 안동으로 6.25전쟁 전까지 아버지는 안동경찰서 경찰관으로 근무중이셨다고 했다.
“아버지가 소식을 일찍 접하셨어요. 북한 인민군이 안동 근처까지 내려왔다고 하더군요. 본인은 죽더라도 가족은 살려야 한다며 어머니와 자식들을 피난길에 보내셨습니다. 그게 아버지와의 마지막이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 고향에 가보았으나 아버지의 생사를 알 길이 없었습니다.”
안동을 떠나 의성, 영천, 대구 방면으로 향하던 피난길은 처절한 배고픔의 연속이라고 했다. 소나무 껍질을 벗겨먹기도 하며 근근이 목숨을 이어가던 중 영천을 지났을 무렵 다부동 전투가 벌어졌다고 했다.
“당시엔 15세 이상만 돼도 전투에 나가버리니 현장에 총알을 나를 인력이 부족했습니다. 근데 그 일을 해 주면 밥을 준다고 하더군요. 오랜 배고픔에 시달렸기에 탄통을 쥐고 다부고지를 오르내리는 일을 하게 됐습니다. 그 때 제 나이가 7살이었고 제 또래들이 4명 정도 있었던걸로 기억합니다. 총알을 날라주고 오면 쌀밥을 고봉으로 주니 얼마나 좋았겠어요. 조금 먹다가 일부는 풀잎에 싸서 어머니와 동생들에게 가져다주었습니다. 하루는 또래 친구가 총탄에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겁이 나 일을 그만두려 했지만 아침만 되면 배가 고프니 밥의 유혹에 못 견디다 다시 현장으로 달려가 탄통을 들었습니다.”
일곱살 아이마저 총알을 쥐어야 했던 전쟁의 참상이 아닐 수 없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지역을 옮겨다니다 부산에 정착한 도 회장은 또 한번의 전쟁길에 오르게 된다. 베트남 전쟁이었다.
“중학교 졸업 후 부산으로 와서 석탄을 날랐습니다. 그런데 내륙에서는 볼 수 없었던 광활한 태평양 바다가 눈앞에 펼쳐지니 너무 좋더군요. 바다를 보면서 넓은 세상을 꿈꾸고 ‘자이언트’와 같은 외국의 명화들을 감상하며 서구 사회와 성공적 삶에 대한 갈망을 하게 됐습니다. 그러던 중 월남전 파병 소식을 접했습니다. 만 18세부터 지원할 수 있다는 말에 나이가 차기를 꼬박 기다렸다가 지원하게 됐죠.”
보통 1년이면 돌아올 것을 도 회장은 3년간 베트남에 있었다. 당시 위생병 보직이었으나 낮에는 공병대 물자를 나르기도 하면서 오랜 시간 머물렀는데 그 때 입은 고엽제 피해가 훗날 후유증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여행가로 시작된 제2의 인생
“어쩌면 고엽제 후유증이 인생을 바꾼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한국에 돌아와 한참 사업을 일구고 정신없이 살아가던 중에 갑자기 쓰러지기 시작했습니다. 길을 걷다가도 픽 쓰러지곤 했죠. 고엽제 후유증을 앓으며 이제는 죽는구나, 내게 남은 인생이 1년일지 2년일지 모르겠구나, 싶었습니다. 그래서 얼마 남았을지 모를 인생을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며 살자고 다짐하게 됐습니다. 목숨을 연명하기 위해, 성공하기 위해 악착같이 살아왔지만 정작 제 자신을 돌아볼 시간이 없었거든요. 그때부터 세계 각국 오지로 떠나게 됐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마음이 편해지니 있던 병도 없어지더군요. 도전력도 더 생기고 창의력도 커진 것 같습니다.”
도 회장은 지금까지 190개국을 다녀왔다. 10개국을 더 다녀온다면 세계 기네스북에도 오를 수 있는 기록이다. ‘불경일사 불장일지’(不徑一事 不長一智: 한가지 일을 경험하지 않으면 한가지 지혜가 생기지 않는다.)란 말을 좋아한다고 한 그는 “나는 발로 독서했고 길 위의 움직이는 학교를 다녔다.”고 자신했다. 흔히 가기 어려운 공산 국가나 아프리카 오지, 중동 지역 등도 다니며 위기의 순간을 많이 모면했던 그는 <신비의 나라>(2004), <여행의 위대한 순간, 그래도 살아있으라>(2015), <빠샤 아저씨>(2019) 등의 책을 통해서도 이야기를 공유해왔다.
“많은 국가들 중에서도 특히 6.25전쟁 참전국들을 여행할 때는 가슴이 먹먹합니다. 22개국의 얼굴도 모르는 수많은 젊은이들의 피가 있었기에 우리나라와 우리 가족이 존재하는 것일테니까요. 유엔참전국이던 에티오피아에 갔을 때가 기억납니다. 여행중에 에티오피아 국립합창단이 재정적 문제로 없어진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 음악을 사랑하고 또 우리에게 도움을 주었던 국가의 사정이기에 그냥 지나칠수가 없어 부족했던 1만불 정도를 보태어 합창단이 회생될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에티오피아 경제수준에서는 매우 큰 돈이었는지 대통령과 국무총리가 직접 나와 고마움을 전하더군요. 보람되면서도 마음이 아팠던 순간입니다.”
하나되게 하는 음악의 힘
도 회장의 음악에 대한 사랑과 국가에 대한 애국심은 특별한 노래 제작으로도 이어졌다. 바로 ‘6.25전쟁 UN참전국 Song’이다. 한국인에게는 동요 '작은 별'로, 외국에서는 'ABC 송'으로 귀에 익은 모짜르트 변주곡에 22개 참전국의 국명을 붙여 만든 곡이다. 도 회장은 지난 해 7월 7일 부산 영화의전당 BIFF 하늘연극장에 777명을 초창한 가운데 ‘UN참전국송 작사기념 77콘서트'를 열고 가족들과 무대에 올라 이 노래를 소개했다. 당시 박종왕 유엔평화기념관 관장도 현장을 찾아 "7월 7일은 대한민국의 자유와 민주를 지켜내기 위해 유엔군 사령부가 처음으로 결성되었던 날로, 이런 날에 의미있는 공연을 만들어주어 감사하다.”고 전한 바 있다.
“우리가 점점 이들의 고마움을 잊어가는 것 같고, 특히 어린 세대들일수록 잘 모르는 것 같아 전 세계인 누구나 쉽게 따라부를 수 있는 멜로디에 가사를 붙이게 됐습니다. 가사 마지막이 ‘독일’로 끝나는데, 독일은 지난 2018년에 참전국(의료지원국)으로 포함되었습니다. 많은 분들이 이 노래를 따라 부르면서 이들의 고마움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부산국제합창제 조직위원장도 맡고 있는 도 회장은 지난 2018년 남·북(탈북) 합창단의 결성에도 힘을 보탰다. ‘코리아 합창단’이란 이름으로 그해 부산국제합창제 무대에 올라 특별상을 수상한 탈북가정의 합창단원들 모습은 당시 TV조선 다큐멘터리로도 방영돼 큰 관심을 모았다.
“처음엔 많이 힘들었습니다. 북한에서 노래를 해 본 경험이 없어서인지 노래는 물론 대화를 이끌어내는 것도 쉽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같은 또래의 한국 합창단원들과 섞어놓으니 표정도 밝아지고 점차 변화가 오더군요. 다른 사람들이 잘 부르고 노는 모습을 보면서 금새 비슷해져갔습니다. 역시 환경이 사람을 만드는 걸까요. 마지막 무대에 오른 아이들을 보면서 저도 눈물이 났던 기억이 나네요.”
음악을 ‘말로는 전할 수 없는 영혼의 터치’라고 설명한 그는 수많은 강연을 다녀봤지만 30분의 강연보다 3분의 음악이 더 큰 감동을 줄 때가 있다고 하면서 한반도 통일 운동에도 음악이 어우러졌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도 회장은 최근 통일을실천하는사람들 상임고문직도 흔쾌히 수락했다. 그의 경험과 재능이 통일운동에 어떤 시너지로 작용될지 기대가 모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