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사제목 [전월선 오페라가수] “한반도의 비극, 이해와 사랑으로 극복해가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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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월선 오페라가수] “한반도의 비극, 이해와 사랑으로 극복해가야”

코리안드리머
기사입력 2019.09.02 09: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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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s.jpg▲ 전월선 오페라가수 / 재일교포 2세 (사진=지난 8월 15일 일산 킨텍스에서 열린 '통일실천축제한마당' 무대에서 전월선 씨가 '고려 산천 내사랑', '아리랑'을 부르고 있다.) 

“내게는 두 개의 조국이 있다. 하나는 나를 낳아 준 곳이고 하나는 나에게 삶의 혼을 넣어 주고 내가 묻힐 곳이다. 내 남편이 묻혀 있고 내가 묻혀야 할 조국, 이 땅을 나의 조국으로 생각한다.” 이는 남(南)도 북(北)도 아닌, 일본사람으로서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인 영친왕과 정략결혼을 하여 황태자비가 된 이방자(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 / 1901-1989) 여사가 남긴 말이다. 

한반도 분단의 아픔과 비극은 이토록 우리 민족은 물론 한일 관계에도 깊고 복잡하게 서려있다. 비운의 이방자 여사의 생애를 다룬 일본의 오페라극 ‘조선왕조 마지막 황태자비’(The Last Queen)의 주연 배우이자 제작자인 전월선 오페라 가수는 “한일 간의 아픔과 그 안에서도 화합을 이루고자 했던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비의 마음을 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재일동포인 전월선씨가 모든 대본을 직접 써서 완성된 이 오페라 극은 일본에서 공개되자마자 일본 관객들의 큰 관심과 언론의 찬사를 받았다. 전석 매진으로 재연은 물론 지난 봄 오카사 공연에 이어 오는 가을에는 도쿄 공연을 앞두고 있다. 그는 “한국에서 이 공연을 보기 위해 오신 분도 많았다. 한국인, 일본인에 상관없이 많은 관객들이 눈물을 흘렸다. 아픔을 인정하면서도 화합을 위해 노력했던 이들의 진심을 지금도 갈등하고 대립하는 청년 세대들이 새롭게 가늠해볼 수 있길 바란다.”고 전했다. 

인터뷰·글 허경은


“한일 관계 악화 안타까워” 

최근 불거지고 있는 한일 관계 악화에 대해 안타까움을 토로한 전 씨는 이 오페라극의 한국 상영이 성사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관계자들과 협의를 지속하고 있다. 

“이방자 여사는 한국 해방 후에도 남편인 영친왕이 고국 땅을 밟을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함께 한국에 들어왔으나 몸이 좋지 않았던 남편은 금새 세상을 떠났고, 혼자 된 몸으로 계속해서 한국에 남아 죽는 날까지 장애 어린이를 돕는 복지사업을 벌였습니다. 일본인이란 신분 때문에 때로는 멸시를 받기도 했지만 어설프게나마 조선말을 배워서 한국인과 가까워지려 노력했고, 본인 스스로 조선의 마지막 황태자비로서 책임을 다하기 위해 생을 바친 후 한국 땅에 묻혔습니다.” 

전 씨는 이방자 여사의 생애를 연구하여 모든 대본을 직접 작성했고, 그의 15세 때부터 87세까지의 삶을 직접 연기함으로써 한일 화합의 다리 역할을 하고자 했다. 3·1운동 100주년을 맞음과 동시에 반일감정이 높아진 지금 전 씨의 메시지에 귀를 기울이게 된다.

포스터 full_s.jpg▲ 지난 3월 오사카에서 공연된 오페라극 ‘마지막 황태자비’(The Last Queen)의 홍보 포스터 (공식 홈페이지= www.lastqueen.net)
 
“가장 안타까운 점은, 한국 정치도 일본 정치도 상호 간의 감정적인 부분을 상황에 따라 정치적으로 이용한다는 점입니다. 막상 일반 시민들을 만나보면 그런 배타적인 감정이 크지 않거든요. 한일 문화교류가 활발해진 이후로 일본 사람들은 한국인과 한국 문화에 대해 매우 우호적이고, 한국인들도 일본에 자주 방문하며 서로를 이해하고 친분을 쌓아 왔습니다. 한일관계가 정치적인 계산에 휘둘리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또 하나의 이산가족, 북송선에 오른 재일교포들
  
재일교포 2세로 일본 태생인 전 씨는 1994년 서울 땅을 처음으로 밟았다. 서울정도 600주년을 기념하여 그가 주연인 오페라극 '카르멘'이 서울 공연에 초청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보다 9년 앞선 1985년, 전 씨는 한국보다 북한을 먼저 방문했다. 김일성 주석의 초청에 의해서다. 

“부모님이 그토록 바라던 고향 땅(한반도)을 제가 밟은 건 한국보다 북한이 먼저입니다. 사실 여기에는 복잡한 가족사가 얽혀있습니다. 북한은 일본에 거주하는 한인들을 대상으로 1959년경부터 북송사업을 대대적으로 벌였습니다. 일본에는 더이상 미래가 없다, 북한에서 몇년 간 일하면 (경제적으로)더욱 성장할 수 있다, 등의 거짓 선동을 한 것이죠. 순진했던 저희 부모님도 그 말을 믿고 오빠 네 명을 북송선에 태워 북한으로 보냈었습니다. 그로부터 25년여 세월이 흘렀을 즈음, 일본에서 성악가로 자리를 잡은 저에게 평양으로부터 초청장이 날아왔습니다. 김일성 주석의 생일 기념 공연에 서달라는 것이었죠. 어떤 일이 있어도 오빠들을 만나야한다는 사명감과 매일처럼 오빠들 처지를 걱정하시던 어머니의 심정을 생각해 방북을 결심하게 됐습니다.”   
 
전 씨는 평양 공연 덕분에 오빠들을 개인적으로 만나 볼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오빠들과의 처음이자 마지막 만남이 되었으며, 심지어 수용소에 보내졌다가 나왔다는 것을 들은 것 외에는 오빠들의 소식을 지금까지도 들은바가 없다. 전 씨는 복잡하고 어려운 가족사에 대해 더이상 언급하는 것을 어려워했다. 

“비극이죠. 한반도 분단의 비극입니다.”    

남·북·일 정상 앞에 선 최초의 가수

1985년 평양 공연이 있은 이후로 북한에서 거듭 초청이 이어졌지만 전 씨는 응대하지 않았다고 했다. 정작 부모님의 고향(남한)에 갈 기회를 영원히 못찾게 될까봐 걱정됐던게 그 이유다. 북한 공연 후 한국 방문을 고대했던 전 씨는 ‘북한을 먼저 다녀왔기에 한국에서 받아줄리 없다’고 말하는 주변인들의 부정적인 의견이 많아 9년만에 이뤄진 서울 공연은 꿈같았다고 전했다.  

“저는 비록 일본에서 조선학교를 다녔지만 저희 부모님은 모두 한국(남한) 분들이시라 항상 제가 고향에 가볼 수 있기를 바라셨습니다. 그 꿈이 이뤄진거죠. 하지만 서울에 도착해서 쏟아지는 질문은 ‘북한에 왜 갔느냐’, ‘왜 일본에 사느냐’, ‘한국 국적으로 전향을 한 것이냐’ 등이었습니다.”

반일·반공 의식이 모두 강했던 당시에는 일본에서 조총련 계 조선학교를 다니고 평양 공연도 다녀온 전 씨에게 우호적인 감정보다는 사상적인 의심과 적개심이 더 컸던 시대였다. 

“일본의 조선학교에 대한 오해가 있습니다. 처음 조선학교가 생길 당시에는 남·북의 구분 없이 그저 ‘하나의 한국’인이 만든 민족학교였죠. 한국인들은 여러 핍박 속에서도 우리 언어와 문화를 잊지 않고 교육을 받아야 한다는 사명감으로 대부분 민족 학교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전쟁으로 인해 남북이 갈라지고 이념갈등이 극심해지면서 60년대 후반, 즉 제가 초등학교 3학년쯤 되었을 때 갑자기 조선학교가 조총련계로 흡수되며 김일성 주의 교육이 시행되기 시작했죠. 한국의 상황을 실감하지 못한 저희 세대들은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받으면서도 그저 가르쳐주는대로 배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kbs 스페셜s.jpg▲ 2013년 방영된 KBS스페셜 '전월선'편 (출처=KBS 방송화면 캡쳐)

전 씨는 서울 방문 이후에도 음악적 활동을 지속했고 2002년 한일월드컵 당시에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전 일본 총리의 초청 아래 김대중 대통령 앞에서도 공연할 수 있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한일 관계 회복을 위해 노력했었고, 당시 고이즈미 총리도 월드컵 개최를 계기로 김 대통령을 총리 관저로 초청해 환영 행사를 열었습니다. 그 때 제가 그 자리에서 독창을 선보이며 남·북·일 정상 앞에서 공연한 최초의 가수로 기록되기도 했습니다.”

“흩어진 한민족, 아리랑으로 다시 하나되길”

‘남(南)이나 북(北)이나 / 그 어디 살아도 다 같이 정다운 형제들 아니련가 / 동(東)이나 서(西)이나 / 그 어디 살아도 다 같은 그리운 자매들 아니던가’ 전 씨의 대표곡 중 하나인 <고려 산천 내 사랑>의 가사이다. 재일 동포의 시각에서 한반도의 비극은 남북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동서로도 이어지며 전 세계 교포들의 삶에 남아있다고 말했다. 

“그동안 수많은 공연을 해왔습니다. 일본, 미국, 중국, 러시아 등 곳곳을 돌아봤는데 이 노래를 부를 때마다 우리 교포들은 눈물을 흘리더군요. 가장 뼈저리게 한반도의 비극을 느낀 때는 평양과 서울을 차례로 방문한 직후였습니다. 분단의 아픔과 현실이 피부에 와 닿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 이 노래를 더 부르게 되었습니다. 화해와 평화의 메시지가 동서남북으로 뻗어나갔으면 좋겠습니다.”
 
전 씨는 올해 초 일본에서 ‘아리랑다리회’라는 단체를 설립하고 회장을 맡아 아리랑 공연의 확대를 기획하고 있다. 다가오는 2020년 도쿄올림픽을 기해 한일 우호와 한반도 평화를 염원하는 ‘아리랑축제’(가제)를 펼칠 계획인데, 이를 위해 한국과 일본을 오가며 예술 분야 관계자들을 만나고 있다. ‘아리랑’은 일본인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다. 전 씨는 “한국, 북한, 일본, 그리고 전 해외 동포들 모두가 공유하고 있는 정신이 아리랑이다. 아리랑이야말로 한국과 일본, 세계를 잇는 다리가 될 것이다. 나는 음악가로서 내가 할 수 있는 분야에서 역할을 다하여 한국의 통일에 기여하고 싶다.”고 말했다.
 
아리랑.jpg▲ 전월선 씨의 아리랑 공연 영상 (출처=전월선 공식 유튜브채널)
 
그가 부르는 ‘아리랑’, ‘고려 산천 내 사랑’, 직접 열연을 펼친 창작 오페라 ‘조선왕조 마지막 황태자비’ 등에 이르기까지 그의 예술적 행보를 돌아보면 한국의 역사와 무관한 것이 없다. 그의 삶과 노력이 전하는 간절한 메시지에 지금의 세대들이 응답해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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