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반재철 전 흥사단 이사장 / 범시민사회단체연합 상임고문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아 그 어느 때 보다도 지난 100년의 의미를 되새기고 독립 정신을 기리기 위한 관련 행사들이 전국 곳곳에서 이어지고 있다. 도산 안창호 선생이 결성한 독립운동단체 흥사단의 이사장을 5년간 역임(2009~2013)한 반재철 현 고문도 이와 관련해 분주한 한 해를 보내고 있다.
흥사단은 1913년 5월 13일 우리나라 사람에 의해 설립된 최초의 NGO이기도 하다. 지난 2013년은 흥사단 설립 100주년이었다. 당시 이사장이던 반재철 고문은 도산 정신을 기리기 위해 100년사를 편찬하고 기념식을 주도하며 흥사단 100주년 사업을 완성하며 이사장직을 마무리했다. 현재는 고문이자 범시민사회단체연합(범사련) 상임고문을 맡고 있다.
“3·1운동의 가장 큰 특징은 어떤 이념에 상관없이 모두 ‘한 덩어리’가 되어 운동을 일으켰다는 점입니다. 당시에도 군주국가와 공화국, 사회주의와 민주주의 등 추구하는 국가의 모습과 이념은 제각각이었죠. 그럼에도 결정적으로 시민들은 지역이나 지식의 정도, 직업·종교적 배경에 상관없이 남녀노소가 모두 한 덩어리가 되어 뭉쳐졌습니다. 그런데 100년이 지난 지금을 보세요. 3월 1일,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행사가 열렸는데 각자가 가진 이념대로, 종교대로, 지역대로 자기만의 행사들을 치렀냈습니다. 이것을 하나의 운동으로 볼 수 있을까요.”
한국 역사에서 중요한 시기를 지나고 있는 지금, 각지에서 벌어지고 있는 시민운동에 아쉬움을 드러낸 반 고문은 아직도 올바르게 독립정신이 계승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인터뷰 허경은 / 사진 이용현
독립운동가들이 보여준 단결력
- 3·1운동 100주년을 맞은 소감이 더욱 특별했을 것 같은데...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3월 1일 아침에 광화문에서 열린 3·1절 100주년 기념식에 다녀왔다. 그런데 문 대통령의 ‘빨갱이’ 발언이 나왔다. 친일파 청산을 말하는 것은 이해한다. 친일파와 관련한 과거를 정리하는 게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예우이자 국민들에게는 귀감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상한 논리의 언행을 함으로써 오히려 국민들 간에 이념적 갈등을 더 불러일으키게 됐다. 정치인들이 항상 화합, 단합, 협치, 융합, 통합 등의 용어들을 강조하지만 그들의 언행이 화합 아닌 갈등을 조장하기도 한다. 지난 날을 축하하고 기념하며 국민을 하나로 묶는 가치있는 이야기들이 나와야 하는데 국가가 갈등을 자행한 셈이다.”
- 독립운동을 통해 무엇을 되새겨야 하나.
“자유, 평등, 정의, 평화, 인권, 공생, 단합, 자주, 자립... 우리가 흔히 독립선언서에서 볼 수 있는 키워드들이다. 모두 소중하고 필요한 정신이나, 지금 이 시대에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단합’일 것이다. 3·1운동 당시에도 서로 다른 이념이 있었고 갈등이 있었다. 그럼에도 새 국가를 건설하겠다는 비전 아래 모두 단합해 하나로 움직이는 모습을 보여줬다. 지금은 어떤가. 그렇게 존경하는 안중근 의사에 대해서도, 누군가는 남산공원에서, 누군가는 효창공원에서 각자 자기들만의 행사를 한다. 지난 3월 1일 100주년 행사도 마찬가지다. 정부는 광화문에서, 시민단체들은 시청, 서울역, 파고다공원 등에서 제각각의 경축 행사를 치렀다. 어떤 힘도 단합 없이는 강력히 발휘되지 못한다. 많은 역사학자들도 3·1운동은 ‘한 덩어리’가 된 시민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고 말한다.”
- 흥사단을 결성한 도산 안창호 선생이 가장 강조한 정신은 무엇인가.
“인격과 단결력을 키우고 자본을 모아야 한다고 했다. 도산 선생이 말한 3대 자본은 금전, 지식, 신용이다. 그러나 자본만으로 나라를 되찾고 일등국가가 될 수 있는 건 아니다. 일등 국가는 다른 나라로 하여금 ‘존경’받는 국가인가로 평가될 수 있다. 존경받는 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인격이 필요하고 국제사회가 감동할 수 있는 단결력을 보여야 한다. 한국은 많이 발전하고 성장했지만 여전히 남과 북으로 분단돼있고 한국 안에서도 극렬하게 분열한다. 하나가 되어야 한다. 그런데 이런 분열된 모습으로 통일을 이룰 수 있겠는가. 통일은 외교적 협조 없이는 불가능하다. 지금 우리가 얼마나 국제사회에 통일을 이루겠다는 간절함을 보여주고 있는지 되돌아보자.”
▲ 2013년 발행된 '흥사단 창립 100주년' 초일 봉투 (출처=흥사단 홈페이지)
“중재자 아닌 주인의식 필요”
- 판문점 남북정상회담 1년이 지난 현재, 한반도 정세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너무 급했다. 평화로운 공생의 계기를 만들고, 대화를 통해 개방의 문호를 여는 시도는 모두 좋았으나 너무 급하게 추진해서 기대와 불안을 모두 키웠다. 불과 1년 만에 3번의 남북정상회담을 치르고 2번의 북미정상회담을 이끌지 않았나. 여기에서 우리 국민의 ‘냄비근성’이 또 한번 확인된 셈이다. 이런 과정을 통해 김정은 위원장을 스타로 만들어버리고,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국들의 이해 쟁탈전을 더욱 가속시켰다. 오랜 동맹 관계를 쌓아온 한미 관계에 있어서는 ‘동맹이몽’이란 말까지 나오는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1년이 지난 지금, 기대보다는 우려가 커진 상태이다.”
- 최근 한미정상회담이 ‘노딜’에 그쳤다는 비판이 크다. 그럼에도 금강산 관광, 개성공단 재개 노력 등은 이어지고 있는데...
“대북제재 속에서도 대화와 인도주의적 지원은 계속 되어야 한다는 점에는 공감한다. 모든 분쟁 해결의 첫 순서는 대화이기 때문이다. 대화가 막히면 모든게 막힌다. 과거 추진했었던 결핵환자 돕기, 영유아 영양 지원 등이나 북한의 홍수·산사태를 방지하기 위한 산림 복구사업 추진 등은 지속되길 바란다. 그러나 금강산 관광이나 개성공단 재개는 다른 문제다. 북한에 인도주의 차원의 식·의약품, 물품 등이 아닌 현금 형태의 자금 유통이 발생하는 것은 곤란하다. 신뢰가 없는 상태에서 북한으로 현금이 들어갈 경우, 그 사용처에 대한 불신이 커지게 된다.”
- 북한의 비핵화 해결 위한 한국의 대외 포지션, 어떻게 가져가야 하나.
“우리 목소리를 키워야 한다. 한국은 무엇이 부족해서 이토록 떳떳하게 주장을 펼치지 못하고 있는가. 북한, 미국 어디에 가서도 큰 소리 내지 못하고 어찌보면 비굴해보일 정도로 명확한 포지션을 취하지 못했다. 지도자가 단단하지 않으면 국민도 흔들린다. 최근의 한미정상회담은 비로소 한국의 대외 포지션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현실적으로 확인하는 계기가 됐다. 계속해서 북핵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다면 차라리 한국은 북한과 미국, 그리고 국제사회에 ‘한국도 핵무기를 갖겠다’는 주장을 전략적으로 취해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북핵 위험에 대비하기 위하여 미국의 핵우산도 벗어나 우리 자체적 핵무기를 갖겠다는 주장이다. 이는 실제로 그러하겠다는 의도가 아니라 협상의 우위를 차지하기 위한 전략이 될 수 있다.”
“홍익인간 정신에 기반하여 국가 비전 세워야”
- 강력한 비전이 있었기에 독립을 실현할 수 있었다. 한반도의 미래 비전, 어떤 방향성을 제시하고 싶은가.
“지난 2013년 흥사단 100주년을 맞아 새로운 100년에 대한 비전을 만들고 선언했었다. 바로 ‘정의롭고 행복한 공동체’이다. 정의가 빠지면 행복할 수 없다. 여기서 ‘정의’의 개념은 넓고 어려울 수 있는데 다수가 옳고 의롭다고 공감할 수 있는 개념을 말할 것이다. 정의롭고 행복한 공동체는 작은 단위의 가족에서부터 시작하여, 사회, 국가, 나아가 세계로 확장될 수 있는 개념이다.”
▲ 2014년 1월 4일 열린 흥사단 이사장 이·취임식 및 신년하례회에서 반재철 이사장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 ‘정의롭고 행복한 공동체’를 비전으로 삼는다면 통일국가를 실현하는 것은 당연한 이치로 보인다.
“정확하다. 정의롭고 행복한 공동체는 사실상 우리의 건국이념인 ‘홍익인간’ 정신에 기반한 것이다. 그것이 우리 국가의 정체성이다. 단군 역사를 신화로 치부하여 가볍게 여기는 자들이 있으나, 만약 단군이 실체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 개념을 정립한 우리 선조들이 있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이 얼마나 위대하고 광범위한 비전인가. 홍익인간, 이 네 글자에 모든 진리가 담겨있다. 그렇다면 우리는 당연히 통일 국가를 이뤄야 하고, 이를 위해 사회공동체를 단단히 하고, 또 그에 앞서 건강한 가정공동체부터 이뤄야 한다.”
- 북한 비핵화를 포함해 통일 정책이 표류중인 듯 하다. 정부에 제언한다면...
“나는 가슴에 기러기 모양의 흥사단 로고 뱃지를 항상 달고 다닌다. 기러기는 반드시 떼를 지어 날므로 단결력이 좋고 하늘 위로 치솟으며 높은 이상을 위해 비상한다. 한 쪽 날개에 문제가 생긴다면 방향을 잃고 뱅뱅 돌거나 추락하기 마련이다. 우리 사회에 대입해 생각해보자. 여야 갈등이 심한 국면에 있지만 모두 필요한 목소리이다. 양 날개짓을 힘차게 지속해야 비상하고 멀리 가는 것처럼 다양한 목소리가 균형있게 나와야 건강하게 멀리 간다. 중요한건 몸통이다. 양 날개짓을 지탱하기 위해 튼튼한 몸통이 있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정부다. 정부는 다양성을 인정하고 배려하며 힘찬 날개짓을 이끌어가야 한다.”
▲ 2019년 1월 8일 프레스센터에서 열린 범시민사회단체연합(범사련) 주최의 '2019 시민사회 신년회'에서 반재철 범사련 상임고문을 포함한 주요 참석 인사들이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