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보이·래퍼 라쿤(박재형)
한국 비보이의 실력은 국제적으로 인정을 받고 있다. 각종 세계대회의 우승 트로피를 가장 많이 거머쥔 나라가 한국으로 단연 세계랭킹 1위다. 해외에서는 세계배틀대회에 한국팀이 출전하면 짐을 싸고 돌아간다는 농담이 있을 정도이다. 이런 위상에 비해 한국 비보이의 역사는 20여 년으로 비교적 짧다.
비보이 문화는 어디에서 시작됐을까. 미국이다. 60~70년대의 미국은 흑백 갈등이 증폭되고 폭력·빈부격차 등 여러 사회·경제적 문제로 암울한 시기였다. 당시 청년 세대가 억압된 감정을 춤과 노래(랩)로 표출하며 비보이의 역사가 시작된다.
비보이는 매우 역동적이고 자유분방한 행위예술이지만 암울했던 탄생시기를 반영하듯 표현방법이 다소 거칠고 반항적으로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베테랑 비보이 라쿤(본명 박재형)의 인식은 조금 달랐다. 그는 “춤을 통해 인성과 긍정적인 마음가짐을 배웠다”며 원래 몸치·음치였던 자신이 세계 대회에서 우승을 거두는 비보이로, 랩에 진심을 담아 노래하는 가수로 성장하게 된 과정을 설명했다.
라쿤은 지난 2002년 비보이 그룹 ‘M.B크루’를 창립한 대표로 지금까지 17년 째 활동해 오고 있으며 2015년에는 힙합 듀오 ‘듀넘’(Dual Number)을 결성, 현재 비보이 겸 가수로 팬들과 교감하고 있다.
마룻바닥부터 시작해 국제무대에서 태극기를 들기까지
라쿤이 이끌고 있는 M.B크루의 그룹명은 그 뜻이 의외로 단순하다. ‘마루 바닥’을 소리나는대로 영어로 옮겨 적은 ‘Maru Badak’의 약자이다. 비보이들이 주로 바닥에 몸을 딛고 돌리며 보여주는 현란한 춤사위도 연상되지만, 마룻바닥에서 시작해 전 세계 최고의 비보이가 되자는 뜻에서 그렇게 지었다고 한다.
“사실 처음부터 프로팀을 지향하고 만든 건 아닙니다. 연습실이 딱히 없던 시절 단순히 춤이 좋아 모인 친구들이 어느 청소년수련관에서 팀을 만든 게 시작이 됐고, 팀이 성장하는 동안 일본, 대만 등 외국인 친구들도 합류하며 현재까지 저를 포함해 총 15명의 멤버가 M.B크루로 활동하게 되었습니다.”
세계대회에 나가는 비보이 그룹들은 모두 국가대표나 다름 없다. 라쿤은 “국가에 의해 발탁되어 나가는 건 아니지만, 언제나 나라를 대표한다는 마음으로 태극기를 들고 나간다”며 우승 후 태극기를 펼쳐 보일 때 정말 뿌듯함이 밀려온다고 말했다.
▲ 2016년 프랑스 운베스티(UNVSTI) 비보이 세계대회에서 우승한 엠비크루(M.B Crew) 멤버들이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제공=M.B Crew)
▲ 2017년 대만 타오위안 세계대회에서 우승한 엠비크루(M.B Crew)가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제공=M.B crew)
M.B크루는 다수의 세계대회 우승 전력이 있다. '2017 대만 타오위안 세계대회', ‘2016 프랑스 UNVSTI 세계대회’, ‘2016 중국 BIS 비보이 세계대회’, ‘2016 전주 비보이 그랑프리 10주년’, ‘2015 코리아 배틀 오브더이어’ 등에서 모두 우승을 차지했고, 우승 전적 이외의 모든 수상 경력까지 더하면 이보다 훨씬 많다. 마치 국가 대항전처럼 태극기를 들고 나가니 부담이 크겠다고 하자 라쿤은 “오히려 한국 사람들의 기대치에 대한 부담이 더 크다”고 밝혔다.
“사실 세계배틀에서 우승하는 건 정말 힘든 일입니다. 그리데 1등이 아니면 국내에선 이슈도 안되죠. 그리고 대한민국 사람들의 문화·예술적 눈이 굉장히 높아, 외국인들의 시선 보다는 우리 국민들의 수준과 기대에 못미칠까봐 하는 부담이 더 큰 게 사실입니다.”
메시지 정확히 전달하고자 노래 시작
비보이 공연이 단순히 현란한 춤 동작과 기술만을 보여주는 건 아니다. 모든 공연에는 스토리가 녹아 있다. 라쿤은 공연을 통해 어떤 스토리로 어떤 메시지를 전달할까를 항상 고민한다고 했다.
“비보이가 인기를 얻게 되면서 많은 공연 기획자들이 ‘사물놀이와 비보이’, ‘오케스트라와 비보이’ 등 성격이 다른 컨텐츠들을 접목하는 새로운 시도들을 해 왔습니다. 지금은 그 완성도가 많이 높아졌지만 그 전에는 뭔가 따로 노는 느낌이랄까, 그런 부족함이 있었죠. 춤과 배경음악만을 가지고 스토리를 정확히 보여주기에는 한계가 있어 랩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직접 작사도 해 보고 공연 중간중간에 노래를 곁들이며 명확한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죠.”
그런 욕구 때문에 대중과의 교감 확대를 위해 라쿤은 지난 2015년에 래퍼 크라이버(본명 최용호)와 함께 (주)예술인 소속사를 직접 설립하고 ‘듀넘’(Dual Number)이란 힙합그룹으로 '놀아', 'It's Ok' 등의 앨범을 발매했다. 물론 그것이 가수 활동의 처음은 아니다. 앞서 2010년에 혼성 아이돌그룹인 '퍼스트'(F1RST)로 데뷔한 라쿤은 5년간의 아이돌 생활을 먼저 경험했다.
▲ 힙합 듀오 '듀넘'(Dual Number)의 멤버 라쿤(박재형/ 왼쪽)과 크라이버(최용호). (제공=듀넘)
“아이돌 생활을 하는 동안 마음은 행복했지만 경제적으론 힘들었습니다. 특히 저는 아이돌계에선 늦은 나이인 20대 후반에 데뷔하게 되어 서른이 넘어가는 시점에 이르게되니 생계를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죠. 소속사가 있고 매니저가 관리를 해주면 분명 편한 부분이 있지만 큰 인기를 얻고 수익을 거두지 못한다면 오래 지속하기 어렵습니다. 하지만 그 5년의 생활을 통해 정말 많은 걸 배울 수 있었습니다. 그런 경험이 있었기에 직접 회사를 차리고 듀넘을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음치 극복하고 ‘하면 된다’는 자신감으로 도전
듀넘에서는 크라이버가 작사·작곡을 하고, 라쿤은 주로 작사 작업에 동참한다. 작사에 대해 배워본 적이 없기 때문에 크라이버를 통해 많이 배우면서 실력을 쌓아가고 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저는 한마디로 음치·몸치였습니다. 춤과 노래에 대한 천부적 재능이 없었죠. 노력하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지만 ‘하면 된다’는 믿음과 자신감이 있었기에 지금까지 올 수 있었습니다. 사실 비보이는 많이 다치기도 하고, 하루도 쉼 없이 꾸준히 해야 하는 분야입니다. 올림픽의 비인기 종목들과 다를 게 없습니다. 메달을 따면 반짝 관심을 받을 수 있지만, 그러기 위해 뒤에서는 정말 끊임없는 노력이 뒷받침되어야 하죠.”
비보이와 가수로 이미 활동중이던 라쿤은 뜻밖에도 브라운관을 통해 음치로 출연한 적이 있다. 2016년 1월에 방영된 Mnet '너의 목소리가 보여 2'의 윤종신편을 통해서다. 그 한번의 출연으로 인해 주변으로부터 5년 된 아이돌이 그 정도의 음치였냐며 놀림을 받았다고 했다. 그러나 그런 시선에도 게의치 않고 자신을 알리며 노력을 거듭해 춤추는 래퍼, 혹은 노래하는 비보이로 자리매김을 했다.
▲ 2016년 1월 방영된 Mnet '너의 목소리가 보여 2'의 윤종신편에 출연한 라쿤. (출처=Mnet 방송화면 캡쳐)
“점점 높아지는 한국의 위상, 하나의 코리아로 불렸으면...”
K팝 등 한류가 전 세계에 퍼져 나가고, 한국 비보이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한국에 대한 세계적 관심도 계속 커지고 있다. “해외 공연을 나가보면 예전보다는 확실히 한국에 대해 많이 알고 있다는 걸 느끼게 되는데, 그럼에도 여전히 저에게 북한에서 왔느냐, 한국에서 왔느냐를 묻는 이들이 있다”고 말한 라쿤은 “그냥 하나의 코리아로 불렸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전했다.
“사실 제 할아버지도 이북 분이십니다. 제가 태어날 즈음 돌아가셔서 기억에는 없지만 자라는 동안 할머니를 통해 할아버지가 전쟁 때 남하하신 분이란 이야기를 듣곤 했습니다. 그런 가족사가 있음에도, 저도 젊은 세대라 그랬는지 통일에 대해서는 깊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던 것 같습니다. ‘당장 내가 먹고 살기 힘든데’, 혹은 ‘통일은 정치적인 과제 아닌가’ 하는 생각들이 더 컸던 것 같습니다.”
최근 한반도 통일 운동을 국제적으로 전개하는 ‘ONE K 글로벌 캠페인’의 홍보대사 제의를 받고 이를 선뜻 받아들인 배경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 1월 29일 서울 마포구 유니세프한국위원회빌딩 대강당에서 열린 'ONE K 글로벌 캠페인 조직위원회 전국대표자회의'에서 라쿤(왼쪽)이 유용근 조직위 상임고문으로부터 One K 글로벌캠페인 홍보대사 위촉장을 수여받은 뒤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
“홍보대사 제의를 받고나서 지금도 자주 연락드리는 고등학교 시절 은사님께 바로 조언을 구했는데 “재형아, 통일은 무조건 돼야 해”라고 말씀하시더군요. 그때 깨달았습니다. 그래. 통일은 '꼭' 그리고 '언젠간' 될 일인데, 그동안 너무 무관심하고 준비하지도 않았었구나… 빨리 준비할수록 통일이 더 빨리 오겠구나 싶었습니다.”
“통일 미래, 준비한 만큼 행복해질 것”
그는 통일을 준비하는 방법 중 하나로 청년들 눈높이에 맞는 공감대 형성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그가 참여하고 있는 중·고등학교 방과 후 과정을 예로 들었다.
“4차산업혁명을 주제로 강의를 하고 있습니다. 처음엔 관심 없어하던 학생들도 제가 평창동계올림픽 때 LED의상을 입고 공연했던 이야기를 들려주면 과학의 발전이 일상 생활이나 문화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게 되는지를 관심을 갖고 이해하기 시작합니다. 통일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주입식으로 지식을 강요받던 시대는 지났죠. 요즘 아이들은 대화하며 이해시켜야 하는 세대입니다. 현장에서 아이들과 교류해보니 그런 걸 더욱 깨닫게 됩니다.”
▲ '2018 평창동계올림픽' 폐회식 공연에 참가한 M.B크루가 '조화의 빛'을 주제로 한 루프 댄스를 선보이고 있다. (출처=SBS 방송화면 캡쳐)
라쿤은 청소년들에게 ‘미래’에 대한 교육을, 대중에게는 비보이 공연을 통해 우리의 역사라는 ‘과거’를 보여주고 있다. ‘춤으로 보는 한국사’란 주제로 3·1운동부터 시작하여 광복, 분단, 6·25전쟁, 88올림픽, 2002월드컵 등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춤으로 기획해 공연한 바 있다. 그가 힘들었던 마룻바닥 생활부터 시작해 지금의 위치에까지 오를 수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역사는 잊지 말되, 비극으로만 생각하지 말고 더 도약할 수 있는 과정으로 생각하자”는 취지로 기획했다고 한다.
“저는 힘들었던 우리의 역사를 꼭 비극으로만 보진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 당시에는 비극일 수 있지만, 지나고 보면 더 도약할 수 있는 과정이기도 했으니까요. 생각해보면 통일도 그러할 것입니다. 통일이 어렵고 힘들거라는 목소리도 있지만, 저는 통일의 장점을 더 많이 보셨으면 좋겠습니다. 지금보다 더 좋아지기 위해, 더 잘 살기 위해 하는 거잖아요. 해보지도 않고 계속 단점만 보면서 안된다고 하지 말고, 긍정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준비한다면 그만큼 통일을 잘 맞이할 수 있을 것입니다.”
라쿤이 속한 M.B크루는 지난 평창동계올림픽 폐회식에서 ‘조화의 빛’이란 제목의 공연을 통해 LED 조명이 부착된 옷을 입고 미래를 표현하는 춤을 췄다. 말그대로 아날로그식 뒷골목 힙합 문화가 디지털 기술과 결합하여 전 세계인의 이목이 집중된 가운데 올림픽 무대를 화려하게 장식한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시대적 소명은 그것만으로 끝나는 게 아니다. '하나된 코리아'에서 '하나의 꿈'을 공유하며 모두가 함께 춤추고 노래 할 수 있는 날이 하루 빨리 오도록 해야 하기 때문이다.
▲ 라쿤(박재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