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규석 본지 주필
‘국수가 먹고 싶다’는 시로서도, 노래로서도 감상을 자극하는 작품입니다. 적어도 개인적 취향으로는 그렇습니다.
시는 시인 이상국이 작시했고 그 걸 가사로 작곡된 가요는 가수 김현성이 노래합니다. 시제(詩題)로만 보면 아주 건조한 산문인데, 그 詩句(노래 말)를 음미하며 노래를 듣다 보면 어느 새 가슴이 먹먹해지는 느낌을 받게 됩니다. 겨울 날엔 특히 그렇습니다.
<국수가 먹고 싶다>
- 이상국
사는 일은
밥처럼 물리지 않는 것이라지만
때로는 허름한 식당에서
어머니 같은 여자가 끓여주는
국수가 먹고 싶다
삶의 모서리에서 마음을 다치고
길거리에 나서면
고향 장거리 길로
소 팔고 돌아오듯
뒷모습이 허전한 사람들과
국수가 먹고 싶다
세상은 큰 잔칫집 같아도
어느 곳에선가
늘 울고 싶은 사람들이 있어
마음의 문들은 닫히고
어둠이 허기 같은 저녁
눈물자국 때문에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사람들과
따뜻한 국수가 먹고 싶다
시와 노래의 일관된 정서는, 세상살이가 고달픈, 그래서 삶에 지친 사회적 ‘루저’들에 대한 시인과 가수의 연민과 동류의식이다-라고 생각됩니다. 전문적인 시평(詩評)을 빌리지 않더라도 ‘뒷모습이 허전한 사람과 함께 국수가 먹고 싶다.’는 표현만으로도 이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그럴 것입니다. 거의 전 재산이나 다름없는 소를 팔고 귀가 하는 농부, ‘큰 잔치집 같은 세상에서 늘 울고 싶은 사람’의 뒷모습은 허전하기 마련입니다. 생활에 쫓기는 일반인은 너나없이 다른 사람들의 그 허전한 뒷모습을 눈 여겨 볼 새도 없지만 시인은, 그가 시인인 동안은 그걸 아픔으로 감지하기 마련입니다. 시 쓰기만으로 생존을 꾸려가는 시인이라면, 그 역시 뒷모습이 허전한 사람일 것입니다.
시인은 왜 하필 허름한 식당에서 그들과 함께 국수를 먹고 싶다고 했는가. 도심의 ‘삐까뻔적’ 대형 식당에는 당연히 ‘어머니 같은 여자가 끓여주는 국수’가 있을 리 없습니다. 상투적인 ‘해석’이지만 그런 음식점에서는 인정(人情)을 만날 수 없다는 것을 우리도 시인과 다름없이 알고 있습니다. 그런 곳에서 우리가 확인하는 것은, 좀 추상적 표현을 차용하면, 자본주의적 허영 혹은 탐욕뿐입니다.
농촌 출신인 입장에서, 개인적 정서로서는 아직도 소 팔고 돌아오는 농부의 허전한 뒷모습과 힘없는 발걸음을 어렴풋이나마 기억하고 있다고 삼가 말할 수 있습니다. 농경시대 농어촌의 피폐했던 생존상황을 어린 눈으로도 목격하곤 했다는 뜻입니다. 그 기억은 일종의 정신적 ‘트라우마’로 남아 있는 듯싶습니다.
외양만으로 파악하면, 시인의 표현대로 지금 세상은 ‘큰 잔치집’같은 형국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뭐니 뭐니 해도 우리는 풍요의 실상을 도처에서, 수시로 목격합니다. 그러나 그런 세상에서도 ‘늘 울고 싶은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만이 아닙니다. 어느 시대, 어떤 상황에서도 삶이 눈물 나게 아픈 사람들은 있기 마련입니다. ‘국수가 먹고 싶다’를 통해 이를 새삼 확인하게 됩니다. 어느 때보다도 인정이 그리운 겨울의 한 가운데입니다.